꼬꼬무 5 18 민주화운동

꼬꼬꼬무 5 18 민주화운동 재방송 | 나를 잊지 말아요 오월이 오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9회 5월 19일 게스트 강훈 휘인 송영규 SBS 온에어 실시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꼬꼬무 29회 <나를 잊지 말아요 – 오월이 오면>편은 오는 5월 19일 목요일 밤 10시 30분에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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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28회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서 이야기 해봅니다.

5.18 민주화운동은 1980년 광주 시민과 전라 도민들이 중심이 되어 전두환 보안사령관 및 12·12사태를 발생시킨 신군부 세력의 퇴진과 김대중 등 민주정치 지도자 석방 등을 요구하며 일어난 운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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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한국의 사회운동은 지식인 중심의 운동에서 민중운동으로 변화되는 계기가 됐으며, 사회운동의 목표로 ‘민족해방·사회주의’ 등이 본격적으로 거론되는 기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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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후(10·26 사태)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막을 내리자,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12·12사태로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당시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정승화 계엄 사령관을 대통령 시해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하면서 군부의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이처럼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의 군사독재 연장 움직임에도, 당시 박정희의 사망으로 민주화가 실현되리라는 희망에 부푼 국민들의 기대감은 1980년 ‘서울의 봄’으로 이어졌습니다.

특히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전국의 주요 대학들에 학생회가 구성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5월이 되자 대학생들은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등 본격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하며, 대학 밖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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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5월 14~15일 서울에 모인 전국 27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서울역에 모인 10만 명에 육박하는 학생들을 이끌며 가두시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5월 15일 밤 각 대학 총학생회 대표들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없는 상황에서 군과 충돌한다는 것은 현명치 않다고 판단해 시위를 중단하고 학교로 복귀하자는 결정을 내리는데, 이것이 이른바 ‘서울역 회군’입니다.

하지만 학생들의 시위가 종료되자 신군부는 5월 17일 자정을 기해 기습적으로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했습니다.

그리고 학생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휴교령 등은 물론 김대중·김종필 등 유력 정치인과 재야인사 26명을 연행하면서 민주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돌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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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회군으로 학생들의 시위가 중단된 서울과는 달리 광주에선 5월 16일 대학생들이 중심이 돼 도청 앞 광장에서 대중집회가 열렸습니다.

신군부는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뒤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 전국 대도시에 신속히 군대를 투입했습니다.

특히 서울과 광주가 신군부의 주요한 공격 목표였는데, 광주에는 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가 전남대와 조선대에 배치되었습니다. 

5월 18일 휴교령이 내려진 학교에 들어가려던 전남대생 200여 명은 계엄군에 의해 출입이 저지되자 거세게 항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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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계엄군은 학생들을 구타하기 시작했으며, 점차 교내를 벗어나 광주 시내로 진입하면서 강력한 시위 진압을 실시하였습니다.

특히 시위 가담 여부와 상관 없이 무고한 시민들에게까지 폭행을 가하는 등 무차별적인 시위 진압 행태를 보였습니다.

여기에 5월 19일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시민들까지 시위 대열에 합세하면서 그 규모가 5000여 명으로 불어나자 계엄군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착검한 총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습니다.

5월 20일에는 시위대가 10만 명을 넘어섰으며, 공수부대의 만행에 분노한 운전기사들까지 시민들의 투쟁대열에 동참했습니다.

또 시민들은 광주에서 자행되고 있는 공수부대의 만행을 전혀 보도하지 않고 정부의 발표만을 일방적으로 보도하는 방송국에 찾아가 항의했으며, 이 과정에서 광주 MBC방송국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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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5월 19일 방송

5월 21일에는 광주와 외부를 연결하는 모든 시외전화가 두절되면서 광주는 완전히 고립됐고, 특히 계엄군의 발포로 사망자가 속출했습니다.

시위대 중 일부는 계엄군의 총격에 대항하기 위해 광주 근교의 화순, 나주 등지로 가 총을 확보하면서 무장을 시작했습니다.

이들 무장시위대는 광주시민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시민군으로 불렸고, 시민군들은 주로 광주공원에 있는 시민회관을 본부로 삼고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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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한 시민들이 도청으로 끊임없이 몰려들면서 시민군과 계엄군의 공방이 계속되자 계엄군은 5월 21일 전략적으로 퇴각하였습니다.

광주에서 퇴각한 계엄군은 탱크와 장갑차를 동원하여 외부에서 광주시내로 들어오는 진입로를 차단, 봉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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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29회 게스트 강훈 휘인 송영규

그리고 5월 22일 광주에서는 신부, 목사, 변호사, 교수, 정치인 등으로 구성된 ‘5·18수습대책위원회’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생수습대책위원회’가 결성되어, 시민 자치가 이뤄졌습니다.

시민 자치는 계엄군이 다시 광주에 진주하는 5월 27일까지 6일 동안 이뤄졌는데, 이 기간 광주는 공식적인 치안체계가 완전히 붕괴된 무정부 상태였음에도 단 한 건의 절도 사건조차 발생하지 않는 등 완벽한 치안체계를 유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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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5월 27일 새벽 2만 5000명에 달하는 계엄군은 시위대가 점령하고 있던 전남도청에 진입해 총공세를 가했습니다.

이와 같은 계엄군의 진압으로 끝까지 도청을 사수한 많은 시민군들이 사망했으며, 생존자는 총기 소지자·특수폭도 등으로 분류되어 군부대로 이송되었습니다.

계엄군은 작전을 개시한 지 약 1시간 30분 만에 항쟁을 진압하였으며, 이로써 열흘에 걸친 5·18 민주화 운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 날 방송되는 29회 <나를 잊지 말아요 – 오월이 오면>편에서는 강훈, 휘인, 송영규가 게스트로 출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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